『은교』 - 갈망의 문학적 깊이와 존재론적 성찰
도서 정보
• 도서명: 은교
• 저자: 박범신
• 출판사: 문학동네
• 출간일: 2010년 4월 6일
• 페이지 수: 408쪽
• ISBN: 9788954610681
• 카테고리: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장편소설
영화 예고편을 넘어선 문학적 깊이
처음 소설 『은교』를 알게 된 건 영화 때문이었다. 70대 시인과 17세 소녀라는 파격적인 설정의 티저 영상을 보며 과연 이런 이야기가 단순히 영화로만 만들어진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던 중 동료가 원작 소설이 있다고 알려주었고,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박범신이라는 작가의 깊은 내면으로 빨려들어 갔다.
영화 예고편에서 느꼈던 자극적이고 통속적인 인상과 달리, 박범신의 『은교』는 밤에 썼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고요하고 어둡다. 그리고 때로는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다. 원래 '살인당나귀'라는 제목으로 작가의 블로그에서 연재되었던 이 소설은 단순한 스캔들이 아닌,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소설의 서술 방식 또한 독특하다. 시인 이적요의 회고록, Q변호사의 증언, 서지우의 일기라는 세 가지 관점이 교차하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런 다층적 서술은 독자로 하여금 더욱 깊이 몰입하게 만든다. 마치 러시아 인형처럼 겹겹이 쌓인 이야기 구조 속에서, 우리는 진실과 거짓, 사랑과 욕망의 경계를 탐색하게 된다.
사랑인가, 욕망인가 - 나이를 넘어선 감정의 본질
"우리 사이엔 오십여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 당신들은 이런 이유로 나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변태적인 애욕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이적요의 이 독백은 소설의 핵심을 관통한다. 파스칼이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고 했고, 셰익스피어가 사랑을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했듯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회적 잣대나 시간의 눈금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다.
서른넷이 된 나 역시 이 소설을 통해 또 다른 '사랑'의 의미를 배우고 있다. 20대의 발달과업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평생을 배워도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미묘하다. 박범신은 이를 동물의 은유를 통해 섬세하게 표현한다.
동물 은유로 그려낸 인간의 본성
작가는 끊임없이 각 인물을 동물에 빗대어 표현한다. 은교는 토끼와 새로, 이적요와 서지우는 당나귀로 묘사된다. 특히 히말라야의 당나귀 이야기는 인상 깊다. "평균 무게가 육십 킬로쯤 되는 짐을 지고 가파른 경사면을 올라갈 때 파르르 다리를 떨면서도, 등허리가 해질 대로 해져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죽을 때까지 그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며 평생 군말 없이 히말라야 눈 덮인 고갯길을 넘어다니는" 당나귀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인간의 숙명적 고통과 그것을 감내하는 충직함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서지우가 마지막 길에서 시인의 당나귀와 운명을 함께한 것은 그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노화와 젊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이적요의 이 말은 우리 사회가 가진 나이에 대한 편견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젊음이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듯, 노인의 주름도 과오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다. 갑자기 슬퍼졌다. 아직은 젊다고 믿고 있지만, 언젠가 맞닥뜨리게 될 노화에 대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작가가 인용한 J.프레베르의 시 "늙는다"는 더욱 절절하다: "나의 머리는 반백이 되고 / 나의 배는 복통처럼 불러지고 / 나의 기침은 그칠 새 없다 / 이제는 이제는 이제는 / 젊었을 때는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문학 속에 숨겨진 보석들
시인이라는 설정답게 소설 곳곳에는 아름다운 시구들이 등장한다. 실러의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다"는 말이나, 스탕달의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라는 문장들이 그것이다.
특히 보들레르의 "노파의 절망"에서 인용한 "쭈글거리는 노파는 / 귀여운 아기를 보자 마음이 참 기뻤다 / 모두가, 좋아하고 뜻을 받아주는 그 귀여운 아기는 / 노파처럼 이가 없고 머리털도 없었다"는 구절은 인생의 순환과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대조와 병렬로 완성된 서사 구조
박범신은 끊임없는 대조와 병렬구조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빛과 그림자, 청춘과 노화, 자존감과 열등감, 믿음과 배신, 순수와 천박함, 남자와 여자...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같고 겹치며 중의적이다. 이런 구조적 완성도는 박범신이라는 작가의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다.
독서를 통한 성찰과 깨달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끊임없이 자문했다. 나는 젊은 것인가, 늙은 것인가? 내가 이제껏 느꼈던 사랑이란 감정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을 옳다 그르다 정의할 수 있을 만큼의 논리를 갖추었는가?
아직은 어리다고 스스로 믿고 있기에 당나귀가 아니라 새의 입장에 서고 싶다. 그리고 새처럼 폴짝거리며 다소 아둔하고 멍청하지만 나만 바라보는 당나귀를 찾아나서고 싶다. "The age ain't nothing but a number"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Plus, the environment, too.
책을 덮으며 머릿속에 호텔 캘리포니아의 멜로디가 맴돌았다. 체크아웃은 할 수 있지만 결코 떠날 수 없는 그 호텔처럼, 이 소설의 여운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언어의 향연: 잊을 수 없는 어휘들
이 소설을 읽으며 만난 아름다운 우리말들도 특별한 선물이었다. 여반장(손바닥을 뒤집듯 쉽다), 아퀴(일의 갈피를 잡아 아우르는 끝 매듭), 쇠별꽃(습기가 있는 곳에 자라는 들풀), 지청구(아무까닭없이 남을 탓하고 원망함), 불문가지(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음), 정염(불같이 타오르는 열정), 웅혼한(시문이나 필적따위가 웅장하고 막힘이 없다) 등 잊고 살았던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최종 평가
⭐⭐⭐⭐⭐ (5/5점)
『은교』는 단순한 금기적 사랑 이야기를 넘어선 문학적 성취다. 박범신은 '갈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을 탐구한다. 노화와 젊음, 사랑과 욕망, 창작자와 뮤즈의 관계 등 복층적 주제를 치밀한 서사 구조와 섬세한 문체로 직조해낸 작품이다. 영화의 자극적 포장에 가려진 원작의 진짜 가치는 바로 이런 철학적 깊이와 문학적 완성도에 있다. 인간의 욕망과 갈망에 대한 진정한 성찰을 원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이다. 정말 재미있고 감동이 있는 책이었다. 책을 통해 느낀 깊은 울림은 여전히 가슴을 뛰게 만드는 작품의 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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